제42화
불을 꺼야지요
"내 얼굴을 보기 싫어서?”
"내일은 일찍 일어나셔야 합니다.”
또 다시 존댓말.
후루룩 불이 꺼지고 길게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도 내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러나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만······”
그의 입술을 막는 또 다른 입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구 밖에는 어느새 아침이 오고 있었다.
그러나 흠운은
어리석은 사람이었어.
전말법사 혜선사의 얘기는
그럼 자신은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경우는 습관처럼 자신의 눈썹 위를 쓸어올렸다.
전밀법사는 알고 있었다.
왕이 신라 화랑들의 사기앙양을 위하여
누구든 앞으로 전밀법사를 만나는 자는
극형에 처한다고 했지만
자신과 흠운만은 때없이 전밀법사를 찾았다.
그렇다면 전밀법사는 흠운에게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을 물었을 것이다.
전밀법사는 사람으 죽이러 떠나는 화랑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줄 수 없다고
친구 원광이 내건 화랑 세속오계를 거부했다.
의당히 국법에 의해서 처형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그 동안 화랑들의 정신적 스승인 전밀법사의 직을
오랫동안 감당해왔던 그의 공적을 참작하여
목숨만은 살려두는 대신
그 어느 누구도 만나서 안 된다는 어명을 내렸다.
친구인 원광의 청을 받아들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혹여라도 전밀법사이 설법을 듣고
고구려, 백제와의 치열한 싸움에서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전말법사가 자신과 흠운이 같다면
틀림없이 사람의 목숨과 죽음을 물었을 것이다.
즉 영원을 물었을 것이다.
흠운의 대답도 언제나와 꼭 같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너무나도 분명히
전밀법사는 흠운을 마중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전밀법사는 자신에게는 흠운에게 물었던 정반대로
사람이 아닌 것과 삶을 물었다.
현재를 물었다.
자신에게는 오로지 지금 목숨을 부지해 가는 현재만을,
경우는 앞이 보이지 않는 듯 다시 눈을 비볐다.
자신은 전밀법사가 던졌던 그 물음 그대로
싸늘하게 보냈던 그 눈빛 그대로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다.
죽음을 모르고 오로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면서
주어진 목숨만을 이어가는 그런
숙명적인 삶만을 살아가는 금수(禽獸)인 것이다.
승(僧)과 속(俗)은 얼마나 같으며
얼마나 다른가.
또한 얼마나 다르며 얼마나 같은가.
오로지 삶만이 존재하는 군상들 앞에서
내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전밀법사가 화랑의 도덕율사라는
어마어마한 자리를 내어놓고 지금의 다 쓰러져가는 절,
정안사(靜安寺)로 돌아올 때,
왕과 여러 대신 그리고 많은 화랑들 앞에서 한 말이었다.
그 때의 그 눈빛이었다.
그 때의 그 말투였다.
더 이상 말을 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절망적인 그 낯빛,
그렇다면 틀림없이 틀림없이 전밀법사는
흠운을 배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결코 서로의 마음을 아는 지인(知人)에게는
오는 사람을 환영하는 법도
가는 사람을 배웅하는 법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데······자신에게는······
그렇다면 짐승으로 본 것이다.
가엾다.
산이나 들 어느 곳에서 태어나,
어느 곳에서나 마음을 묶고 머리를 두는
그런 짐승으로.
경우는 다시 눈썹을 밀어올렸다.
그는 선반 위에 얹힌 자신의 장검을 노려보았다.
선례 때문이었을까?
그날 밤 흠운과 숲 속으로 들어가던······
그것 때문이었을까?
선례는 언제나 흠운의 차지였다.
비석치기를 할 때도,
땅 따먹기를 할 때도 선례는 흠운의 차지였다.
경우는 새삼스럽게 그런 것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아무리 자신이 처음부터 선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아니다.
"선례! 선례를 부탁한다!”
흠운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경우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흠운도 분명 그렇게 알고 갔을 것이다.
경우는 다시 온몸의 숨을 내몰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있어 흠운은 선례보다 몇 배나
아니 비교가 되지 않으리 만큼 소중했다.
선례 때문에 흠운을······
그럴 수는 없다.
자신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흠운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흠운을 위해서 적진으로 단신돌파를 몇 번이나 하였던가.
그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것은 흠운도 마찬가지였다.
흠운과 자신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경우는 다시 그의 장검을 내려다보았다.
"흠운장군!"
"흠운장군!”
군중들의 함성이 밀려왔다.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꼭 그것뿐일까?
그는 방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선례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아니다.
그것은 절대 아니다.
함성이 들리고 있었다.
"흠운장군!"
"흠운장군!”
정말 그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낭당대감 경우!"
"낭당대감 경우!"
이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천천히 장검을 빼들었다.
그래 그것 때문이었다.
목숨을 걸고 흠운을 구한 것은 흠운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
경우는 비로소 눈물을 닦았다.
그것은 흠운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흠운이 적과의 싸움에서 선봉으로 죽는 그것이 두려웠었다.
자신이 선봉으로 죽어야 했다.
그것은 왕과 조정.
백성들과 원광법사가 만든 허울의 명예였다.
조정의 대나마 이오, 나마 정신.
그들의 목을 생각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은 그들의 약속대로 자신에게
낭당대감을 주지 않았던가?
그는 장검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갔다.
전밀법사의 눈빛,
그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짐승이다.
짐승은 절대 이렇게 죽는 법이 없다.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갈기갈기,
아무런 흔적도 없이 그렇게 죽어야 한다.
나는 금수다.
나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
"복된 놈."
"너무도 복된 놈, 흠운!”
죽어서도 자신을 이긴 흠운.
눈물이 떨어졌다.
경우는 칼을 다시 칼집에 정성스럽게 박아 넣었다.
들판의 짐승이 될 것이다. 내일은.
경우가 양산의 전투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열왕은 슬프게 통곡했다.
더구나 그 시체마저도 찾을 수 없었다는데
더욱 오열을 금치 못했다.
함께 전투에 참가한 병졸들의 말을 빌자면
온몸에 화살을 맞아 마치 고슴도치가 되어서도
백제군들의 칼숲 천지를 돌진하다가
급기야 사지가 산산이 흩어졌다는 것.